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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12-15 09:27
[[소설]《모래 위의 서명》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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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47만 헥타르


1978년 6월, 청와대 회의실.
에어컨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공기는 눅눅했다.
여름 장마가 막 시작되던 날이었다.
일곱 명의 참모가 원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몽골어로 빼곡히 적힌 서류 더미가 놓여 있었다.
“여의도의 백육십 배입니다.”
내가 말했다.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47만 헥타르. 숫자 자체보다 문제는 위치였다.
“몽골입니다. 고비 사막 한복판입니다.”
누군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이는 고개를 저었다.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곳입니다.” “물도, 나무도, 인력도 없습니다.” “국가 예산을 버리는 결정입니다.”
모든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창밖의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고 있었다.
“각하.”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예산이면 포항에 제철소를 하나 더 세울 수 있습니다. 철강 생산량이 즉시 30% 증가합니다.”
외무부 차관이 말을 이었다.
“몽골은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합니다. 소련과 중국 사이에 낀 나라입니다. 오늘의 계약이 내일 무효가 될 수도 있습니다.”
회의실은 이미 결론이 난 듯했다.
모두가 반대였다.
그때 대통령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맑았다. 흔들림이 없었다.
“자네들은 경제를 말하고 있군.”
조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생존을 말하고 있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세계지도로 걸어갔다.
몽골 고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전쟁이 나면 뭐가 필요한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탄약, 연료, 기름, 항공유.”
그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석유가 한 방울도 안 나오지.”
국방부 차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중동에서 수입하면 됩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르무즈 해협 하나만 막히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가서 적에게 기름 떨어졌으니 싸움 그만하자고 할 건가?”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각하, 그렇다 해도 왜 사막입니까?”
대통령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네는 오늘을 보고 있네.” “나는 50년 후를 보고 있고.”
“50년 후라니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 모래밭이 우리 군대의 심장이 될 걸세.”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막이 심장이라니. 황무지가 전략거점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대통령은 미소도 짓지 않았다.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네.”
그는 자리로 돌아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몽블랑 펜촉이 형광등 아래서 차갑게 빛났다.
“나는 오늘의 박수가 아니라, 50년 뒤 대한민국의 생존에 서명하는 거야.”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잉크가 번져 나갔다.
10초.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를 멈추지 못했다.
도장이 찍혔다.
국새가 선명하게 남았다.
끝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쓸모없는 땅. 모래뿐인 땅.
“언젠가는 알게 될 걸세.”
문을 나서며 대통령이 말했다.
“시간이 증명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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